강감찬의 귀주대첩 정리

학교 수업시간에 강감찬의 귀주대첩에 대해 배웠을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가물가물해지고 할텐데 오늘 말씀드리는 귀주대첩에 대해

읽어보신다면 예전의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 날거라 생각됩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

고려거란 전쟁 드라마에서 귀주대첩 부분이 나오고 있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알려드릴 내용말고도 더 공부하고 싶으시면 아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목차


강감찬의 귀주대첩

배경

1011년,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 현종은 몽진의 시간을 벌고자 요 성종에게 거란까지 찾아가 친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귀주대첩

그러나 1012년에 고려 현종이 친조 약속을 어기자, 요 성종은 강동 6주를 대신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후 거란은 7차례에 걸쳐 국지전을 벌이고 동여진 해적들이 고려를 피해 강탈을 일삼아 여요전쟁이 전개되었습니다.

거란의 침공

1018년 12월 초, 거란은 소배압을 도통으로 10만 대군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강민첨 대장군은 삼교천과 자주에서 거란군을 패배시키는 등 몇 차례의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에 고려 현종은 개경에 계엄령을 내려 청야 전술을 도입했습니다.

결전의 날

귀주대첩 결전

1019년 2월 1일, 귀주성 앞 평원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이 맞붙었습니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남쪽에서,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동쪽에서 각각 귀주성을 내려다보는 하천 건너 구릉에 도착했습니다.

고려군이 먼저 하천을 건너 평지로 내려오자, 거란군은 퇴각이 아닌 전투를 선택했습니다.

양측은 구릉에서 하천을 건너 귀주성 앞 동쪽 평원에서 만나 대회전을 벌였습니다. 원수 강민첨 대장군은 북을 치며 고려군에 돌격을 명했습니다.

결론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며 거란군은 석천, 반령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최정예인 천운군 등 많은 장수가 전사하였고, 소배압은 거란군에게 갑옷과 병장기를 버리고 도주를 명령했지만, 살아 돌아간 이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전투가 끝나자 고려군은 거란군 1만 명 이상을 포로로 삼거나 참수하였고, 이로써 제3차 여요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종결되었습니다.

고려 현종은 승전의 기쁨 속에서 임시 누각을 짓고 승전군을 맞이하며, 강감찬을 찬양하고 황금꽃을 수여하여 9000여명을 포상했습니다.

반면, 성종은 분노하여 소배압을 처형하려 했지만 파직에 그쳤고, 공이 있는 장수들을 포상했습니다.

양국은 전쟁 후에도 복수의 길을 택하지 않고, 고려는 요 성종에게 ‘번국’을 칭하고 공물을 바치게 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성종은 이를 허락하면서 전쟁 전의 조공-책봉관계를 복구하였습니다. 주변 국가들과의 교류도 확대되어 동여진, 서여진, 불내국, 흑수말갈, 철리말갈, 송나라 등이 사신과 토산물을 보내왔고, 동해상의 동여진족 해적들도 소탕하여 평안한 교류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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